▲ 원철스타, 우남 이원철
과학관 체스광장 앞 자그마한 잔디밭 위에 세워져 있는 이원철. 그는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연전 수물과에 진학한다. 함께 입학한 동기들의 숫자는 모두 4명. 당시 수물과 학생들은 외로웠다. 경쟁자도 없고 후배도 많지 않았고 농과처럼 폐과가 될 운명에 처한 형편이었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한 이원철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인 최초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해 온다. 귀국 후에는 교육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고 연전의 교수로 부임한다. 이렇게 하여 소장파학자, 연전 수물과 과장, 학감 등을 함께 역임하던 그는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등에 연루되어 교수직을 박탈당한다. 일제에 의해 다른 교수들 역시 비슷한 운명에 처했던 그 시절, 이원철은 서울 YMCA강당에서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과학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장안의 인기강좌’였다고 한다.
일본의 패전 후, 이원철은 관상대 보존 등의 국가의 과학 사업을 맡는 공무원이 된다. 하지만 1950년, 한창 잘나가던 그는 인민군이 습격한다는 통보를 받고 부인과 함께 음독자살을 기도한다. 도착한 인민군은 미리 준비한 트럭에 그의 책만 전부 실어 가버리고, 두 부부는 다시 깨어난다. 약의 양이 적었던 걸까. 아니면 그가 아직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였을까. 여전히 우리학교의 최초이자 최고의 천문학자로 명성이 높은 그는 그가 발견한 별에 ‘원철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